시를 쓴 지 28년이 된 시인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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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이수명 시인은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책에 싸인을 받았고 인터뷰는 나의 불안을 잠재웠다.
Lee Sumyeong, a poet I met at a cafe in Seong su, was a hard and soft person. I got an autograph on her poem book. The interview quelled my anx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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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 이수명 시인이 읽어주는 「구름」 |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문학동네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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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며칠동안 서점을 돌아다니며 시와 에세이, 시론집 등을 찾아다니고 보느라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와 <나는 칠성 슈퍼를 보았다>가 특히나 감명 깊었는데, 둘 사이의 시간 차이가 많은 만큼 서로가 색다르게 느껴지는 두 저작이었다.
Q.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고맙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등단한 지 28년 되었다. 시를 쓴 지 28년 된 시인이다. 시에 대한 생각을 모은 시론집을 두 번 냈고, 산문집도 냈고 시 강의도 계속 하고 있다. 그렇게 두 가지를 하고 있고 둘 다 재미있다. 강의하는 게 자극이 되는 측면도 있다. 시에 대한 논의를 학생들과 하다 보면 내 생각의 정체를 발견하기도 한다.
가르쳤던 제자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는가.
감각적인 걸 넘어서서 재능이 출중한 친구들이 있다. 등단을 한 친구들도 있고 아직 등단을 못한 친구들도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감각이 되게 좋다. 아무래도 문화가 발전하고 다양한 시도들이 쌓이면서 더 복잡하고 정교한 감수성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듣다 보니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90년대의 학생들과 지금 학생들의 감수성이 어떻게 다른 지도 궁금하다.
90년대는 내가 등단해서 활동하는 시기였다. 굉장히 많이 변했는데, 사실 예전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한다는 건 무의미한 측면이 있다. 그 시대는 그 시대적인 모험이 있고 지금은 현재의 동시대적인 감각이란 게 또 있어서 비교하기가 좀 그렇다.
Q.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시를 쓰고 있었는 지가 궁금하다.
결심같은 건 안 한다. 내 생애에서 결심 같은 걸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재밌어서 하거나 하기 위해서 하거나. 글쎄 어떤 형태의 결심이 있을까. 결심이라는 단어가 좀 낯설다. 시를 처음 쓴 순간을 꺼내기 위해서는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인생의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대신 글쓰기의 자의식이 생긴 시점은 기억이 난다. 언어로 내 자신을 번역하면서, 번역된 언어가 나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가능성까지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글쓰기에 대한 자각이 생겼던 것 같다.
그게 언제쯤이었나.
초등학생 때였다.
굉장히 빨랐던 것 같다.
10살인가 11살 때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유치한 단어들인데, 감정을 언어화해서 슬픔, 고독, 절망 등의 단어를 썼을 때 그 단어들의 의미와 내 존재가 결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언어에 대한 자각,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형성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언어가 갖는 힘에 눈뜨게 되었다. 존재하는 나는 굉장히 보잘것없고, 무의미하고, 모래알 같고, 감각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어서 언어로 자각된 이후에 비로소 내 삶이 존재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쓰는 순간 모든 게 변화하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고 전율을 느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언어에 의해서 존재를 느끼고 세계를 느끼고 인간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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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내 피부에 바람이 와 닿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다. 4월의 바람이 다르고, 5월의 바람이 다르고, 6월의 바람도 다르다.
I consciously do this. I like to feel the wind on my skin. In April, May, June, they're all different.
- 이수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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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표현이 맞을 지 조심스러운데 그냥 과감하게 표현을 하자면, 글을 쓰면서 채워지는가 아니면 비워지는가?
채움과 비움의 수사가 문학에도 들어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을 해보면 채움을 비움으로, 비움을 채움으로 즉각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인 것도 같다. 문학이 인간을 진정시키고 너그럽게 대하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는 무언가를 밀어낼 때, 또 다른 무언가가 솟아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때로 밀어낸 것과 새로 생긴 것이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욕망을 밀어내고 욕망으로 가득차고, 슬픔을 비워버리고 슬픔으로 평화로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문학은 이렇게 비움과 채움에 몰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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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는 칠성 슈퍼를 보았다> 에서 물건을 잘 바꾸지 않는다고 했고 사과를 좋아한다고 쓴 것이 기억난다. 요즘 또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을까?
그 산문집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쓴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사과가 있는 것인데. 사과 좋아하는가?
그렇다.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다. 습관이고 애정이다. 사과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썼는데, 그 중에 <사과나무>라는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다. 몸속에 사과가 쌓인다. 사과가 나를 가득 차지하면 비로소 사과는 숨진다. 사과가 숨질 때 나는 사과나무를 본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때로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먹은 사과들이 내게서 탈주하는 것이다. 어제를 살해한 오늘의 태양처럼 빛나고 향기 나는 사과들. 사과는 사과나무를 불태운다. 사과나무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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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 존재와의 인연이 우리의 삶인 것 같다. 아침마다 사과를 먹으면 차갑고 단단하고 달고 새콤한 자극에 뇌가 깨어나고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과가 나의 시작인 셈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 좋아하게 된 게 있다면 바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베란다의 양쪽 문을 다 연다. 바람을 숨을 쉬면서 맞이한다. 밖의 기운을 깊게 맞이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내 피부에 바람이 와 닿는 것을 느끼는 것이 좋다. 하루를 열 때 바람이 외부 세계의 대표 주자가 되는 것이다. 4월의 바람이 다르고, 5월의 바람이 다르고, 6월의 바람도 다르다. 4~5월에는 바람에 꽃 향기가 섞여 있다. 이 향기가 진해졌다가 조금씩 흩어지면서 이제는 순전히 초록의 냄새, 나뭇잎의 냄새가 섞여서 들어 온다. 하나만 더 애착이 가는 것을 말한다면 인스턴트 아메리카노 카누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닌데 코로나 때문에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을 때 원두를 직접 갈아 내려 마셨다. 그러다가 바챠드립커피로 이동했고, 이제는 더 간단하고 밋밋한 카누가 가까이 있다. 이 심플하고 단순한 작은 존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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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잘 안되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뉴스를 보거나 산책을 한다. 그러면 내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실 생각이라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It doesn't seem to work if you try consciously. Watching the news or taking a walk, then my thoughts become not that important. In fact, does it really matter?
- 이수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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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보통 사람들이 감각적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기보다 과거의 일을, 미래의 일을 생각하느라. 아까 말한 것처럼 비우고 채우지를 못한다. 생각때문에 힘드니까. 대신 사유하지 않으면 시라는 것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망령된 생각을 벗어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인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잘 안되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뉴스를 보거나 산책을 한다. 그러면 내 생각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사실 생각이라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언제든 바뀌는 것이 생각 아닌가. 그럼에도 생각이 계속 붙어 있으면 생각을 망령으로 접수하지 말고 즐기는 방법도 있다. 생각의 즐거움, 그러다가 생각을 넘어서는 감각이 나타나면 감각의 즐거움, 그러면 사유와 감각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시라는 것도 사유와 감각에 걸쳐 있고 둘을 넘나드는 것이라 본다.
둘 다 중요하다는 건가.
생각은 우리를 조이기도 하지만 또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게도 해준다. 생각은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다시 생각 너머로 나아가는 감각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것인가 보다.
그렇게 움직이는 것 같다. 그리고 오히려 이것이 생각에 매이지 않는 길일 수 있다.
이것도 막간 질문인데, 쓸 때가 즐거운가. 읽을 때가 즐거운가.
당연히 쓸 때가 즐겁다. 쓰는 것을 즐긴다. 무엇을 즐기냐 하면 맨 처음의 막막한 상태, 아무 것도 없고, 무엇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러한 불가능 상태를 즐긴다. 어떠한 말이, 어떠한 이미지가 생성될지 예측할 수 없는 거의 완전한 무의 상태를 즐긴다. 그러다가 이 무의 지평에 마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듯이 어떤 미세한 언어의 터치가 출현하는 그 숨막히는 순간을 즐긴다. 시쓰기는 불가능에서 가능이 비롯되는, 불가능과 가능의 대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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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은 다양한 형태로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 방금 말한 것 같은 체험이나 즐거움을 더 온전히 느끼기 위해, 쓰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팁이 있는가.
쓰기 자체가 특별한 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모르는 채 그냥 가고 싶은 대로 써나가는 것이 더 흥겨울 것 같다. 무얼 위해서 쓰거나 어디에 맞춰 쓰는 것은 쓰기의 탄성을 꺼트리는 게 아닐까. 팁이라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드는 생각이 있는데, 쓰는 즐거움을 위해 쓰기의 불량함을 너무 정돈하지 않아도 좋다는 점이다. 쓰기는 사실 약간 불량한 것이다. 고분고분한 쓰기란 없지 않을까. 언어가 움직이기에 쓰기는 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가 매끄럽기보다 다소 거칠고 까칠한 결을 유지하고 있을 때 살아있는 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또 최근에 SNS에 다양한 형태로 글을 쓰게 되는데, 언어가 보이는 형태로 옮겨가는 것도 쓰기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일종의 쓰기가 아닐까. 앞으로는 쓰기의 필드가 더 넓어지고 다양해질 것이다. 쓰기 자체의 정의가 바뀔지도 모른다. 기존의 관성에 구애되지 않는 활발하고 살아있는 쓰기를 해야 할 이유이다.
다른 방식의 창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것도 하고 있는가?
아직은 언어로만 쓰고 있다. 그림을 병행하는 시인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지는 못하고 대신 그림 보는 것을 즐긴다. 예전에는 전시회 같은 데 많이 가고 좋아하는 화가의 화집을 사기도 했다.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도 많아서 현대미술 강연이 열린다고 하면 가서 들어보고 그랬다.
그러면 기억에 남는 화가나 미술작가가 있는지.
음 굉장히 많이 변화해서. 예전에는 초현실주와 표현주의를 좋아했다. 또 오랫동안 마티스의 평면적이고 병렬적인 색감에 매혹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전혀 예술적이지 않은 오브제에서 새롭고 과감한 착상을 하는 설치미술 작가들로부터 혁신적인 영감을 받기도 했다. 미술은 시각언어이기 때문에 시의 이미지를 실제화한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직접성 때문에 끌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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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결국 하나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관계였고, 또 멀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도, 이 세상에서 맺은 관계의 포화를 덜어내는 게 되니까. 나는 그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다.
It may sound a little strange, but there are also good parts. We can end up out of a relationship. No matter how good that was, and how painful it was to be apart, it would let go of the saturation of relationships. Then I'm getting easy.
- 이수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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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는 칠성 슈퍼를 보았다>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적어놓았다. '니체는 이의, 탈선, 조롱, 불신 등을 옹호했다. 이에 덧붙여 개인이 전체에 속하지 않아야 사유가 가능하다'. 사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겠는데, 가까운 사람들의 그러한 탈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 모르겠다.
니체는 탈선, 조롱, 불신 등을 병적으로 본 게 아니고 건강하다고 보았다. 어떤 절대적인 것을 병적으로 본 것이고 탈선이나 조롱은 반대로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강하다고 한 것이다. 보통 니체는 국가, 정당, 민족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광기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개인은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보았다. 그래서 개인의 탈선, 이의, 조롱 이러한 것들을 오히려 건강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는가. 아이라던지 애인이라던지.
니체가 탈선을 건강하다고 한 건 그것이 절대성으로의 함몰을 피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이들이 어른의 절대적 가치를 따르게 된다면 그 사회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아이의 이의가 기존의 가치를 부수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게 된 것이 역사가 아닐까 한다. 물론 애인의 경우는 똑같지는 않겠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다.
많이 샤프한 질문일 수 있는데, 만약 애인이 바람을 피웠다. 이것도 수용이 가능한 지점일까?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어도 결국에는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수용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누구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보통은 너무 슬퍼하지 않는가.
물론 슬플 것이다. 그런데 슬프면 안되는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상대의 탈선으로 엇갈리고 어긋나게 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결국 하나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관계였고, 또 멀어지는 것이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도, 이 세상에서 맺은 관계의 포화를 덜어내는 게 되니까. 나는 그만큼 가벼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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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집을 읽을 때 책장을 툭툭 넘기다가 탁 걸리는 것을 보는 게 좋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의 경우는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의 '1990년대'라는 시가 기억난다. 이 시에 대해서 첨언할 부분이 있을 지 궁금하다.
어떤 부분이 눈에 탁 걸렸는가.
'진흙 덩어리'라는 단어였다.
재미있다. 사실 진흙 덩어리가 뭔지 모르는 채 언제나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우리 관계를 못 보게 하는 무엇인가가 이렇게 있는 것이다. 시 제목이 ‘1990년대’니까 '진흙 덩어리'를 90년대의 억압적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시대적인 의미보다는 개인의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것을 진흙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해석 이전에, 감각으로 먼저 들어오는 오브제를 제시하는 것이 시다. 모든 시대가 억압적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90년대에는 혼자 있는 곳이든 누구랑 같이 있는 곳이든 대중 속에 있든 '진흙'이 많았던 것 같다. 신발에만 묻어 있는 게 아니라 얼굴에도, 손에도 묻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왜인지, 진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랬다. 어떤 더깨가 내려앉아 있었다. 물론 지금도 진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은 진흙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묘하게도 진흙을 뒤쫒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느낌은 참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시대 정신까지 들어가 있는 시였는지는 몰랐다.
제목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연인 관계에 관한 시인줄 알았다.
진흙은 연인 사이에도 있고, 나와 대중 사이에도 있고. 나 자신 속에도 있을 것 같다. 진흙은 먼지이기도 하고, 따가운 빛이기도 하고, 벗겨지지 않는 어둠일 것도 같다. 어떤 자리에서든, 관계에서든, 시대건, 개인이건, 투명함이라는 것은 없을 테니까. 언제나 무언가가 우리에게 덧붙여져 있고, 그것은 우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것의 일부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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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인으로서, 인간 이수명으로서의 계획을 듣고 싶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자유롭고 편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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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yeong's Pick
시인 이수명의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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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ow of the King, 1952 by Henri Matis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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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지막 질문이고 답을 안해도 좋다. 어머니께 한 마디 남길 수 있을지.
쉽지 않다. 갑자기. 누구나 애도하는 기간이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타인과 어머니 얘기를 하면 갑자기 눈물이 탁 쏟아지고 그랬다. 지금은 애도 기간이 끝난 것 같다. 이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는 나를 인도해준 사람이다. 잘 해낼거라고 멀리서 지켜봐주지 않을까. 어릴 때 사랑을 많이 주셨다. 덕분에 건강한 멘탈리티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불안이 있거나 슬픔이 있을 때 잘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믿어주는 만큼 사람이 단단해지는 것 같은데. 나중에 시집이 나왔을 때. 하늘에서 지켜봐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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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매거진 (TULP MAGAZINE)
Letters From Tulp
<Letters From Tulp>은 잘 알려지지 않은 아티스트, 주목할 만한 문화의 흐름이나 멋진 공간 등을 소개하는 글들로 이어져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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