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일출, 낮, 일몰, 밤의 반복 구간 사이 휘몰아치는 충동을 마주 본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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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ked Tree, 목마른 계절
글, 사진. 이경지(에세이스트)
과거 나에게 있어 ‘가을’은 퇴폐적인 계절이다. 몸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은 적당하기 그지없는데, 정신적으로는 어디에선가 도움을 바라왔다. 평상시, 정상적인 사고로 세상을 살며 계절의 변화를 음미하다가도 이상하게 이 계절이 다가오면 하루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가을 하늘만큼 높아지고, 지는 해처럼 빨리 변한다. 그렇다. 나무는 벗겨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껴입으니 갈피를 못 잡은 얼굴에 가뭄이 일어난다. 모든 수분이 뇌 안쪽으로 흘러들어가 눈 밑으로 들어간다. 땅 끝으로 떨어지는 태양에게 싹싹 빌어보지만, 머리 위로 덮어오는 밤은 이런 마음 알 턱이 없지. 검푸른 새벽에 어찌할 바 몰라 몸부림치다 맞이한 아침에 누구보다 일찍 기지개를 편다. 나는 그제서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새벽, 일출, 낮, 일몰, 밤의 반복 구간 사이 휘몰아치는 충동을 마주 본 계절. 가을.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얼마 전,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중, 위너 편을 봤다. 멤버 중, 김진우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상담이 끝난 후,‘무시형 불안정 애착’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인터뷰를 하는 내용을 보니 청소년기 내가 느꼈던 모양새와 같았다. 나도 그처럼 부모님의 부재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우리 할머니 말을 빌려 “어디 가서 못 먹었다는 소리 들을까 봐, 열심히 키웠다.”처럼 할머니는 우리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 주시려 애써주셨다. 그러니 마냥 철없게 굴 수가 없었다. 눈치도 많이 봤고, 주제를 알았어야 했다. ‘키워줌에 감사하다’라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몸이 자라고, 맞닥뜨리는 변화는 그저 숨기기 급급했고, 걱정될만한 일은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린아이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혼나는 무서움도 두려움이지만, 대화라는 익숙지 않은 소통 방식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 그런 자리를 안 만들기로 한 것이다. (처음이 항상 떨렸다. '어떻게 말하지?'라는 고민을 많이 했다.)
세월이 지나 앞자리가 3과 가까워질수록 어렸을 적 꿈꾼 어른과 다른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나쁜 길로 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가로막힌 기분에 답답한 마음만 든다. 스물여덟.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없을뿐더러 이상한 곳에 집착만 생겼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충동적 감정에 있어 과격해짐을 느낄 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수 백 번을 느끼곤 한다. (어쩌면 ...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옛날부터 고민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어른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사이코패스일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러니 일찍이 선택해야만 했다. '문을 닫느냐, 연기를 하느냐.' 천천히 타인과의 소통에 벽을 쌓았으며, 자신만의 방 안에 갇혀있기를 자초했다. 세상이 좁아지니 생각하는 방식도 작아졌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고 (섣불리) 판단하게 됐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한 순수한 마음은 잊은 채, 표정과 말투로 선을 긋고 철저히 문을 닫았다. 혼자 일어서야 진정한 어른이라고 하고서는 편안함이라는 명목하에 문학을 찾았다.
자. 보라. 온갖 두려움에 어떤 것이든 시작도 못하는 어른 아이가 돼버렸다. 고작 가을바람을 못 버텨 술 취한 밤이면 베게 맡을 적시고 또 적시고 만다. 그러니 남에게 기대면서 흑역사를 보여주는 것보다 혼자만의 어둠 속에서 깊이를 만들어내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이 비정상적인 두려움, 공포심 … 충동심을 떨궈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물론 몇 날의 밤은 몇 개의 문학작품을 통해 편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은 몇 개의 불안정을 잠재웠지만, 그 선 사이사이 위태로움을 파괴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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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친구가 중고 책방에서 전혜린을 만났다. 범우사에서 나온 <목마른 계절>. 곧장 동네 서점으로 가서 책을 주문했다. 몇 장 찍어서 보내준 문장에 동공이 두근거렸다.
새 책이었던 책은 이제 이곳저곳 때가 묻어있고 헐거워졌으며 깔 맞춘 파란색 포스트잇이 이곳저곳 붙여져 있다가 그것도 부족해 모서리가 접혀있다. 쨍쨍했던 계절에 낙엽이 쌓여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물음이 나의 질문과 맞닿을 때마다 뇌가 밖으로 달아나는 기분이다. 마치 가을과 봄이 만나는 확장. 어느 날은 삶의 길에서 방황을 하다가도 어느 날은 그처럼 작은 행복에 따라 감사함을 느낀다. 어떤 날엔 마음속 성숙을 동경하다가도 어느 날엔 어린아이 같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때도 있다. 그의 빈자리에서 남겨진 이름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무의식의 무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 먼 곳에서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 너무나 막연한 설계 ——— 아니 오하려 ‘반설계’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 이루어짐 같은 게 무슨 상관있으리오?...'
<목마른 계절 본문 중, 먼 곳에서의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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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계절>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작가를 알았다는 것에 기뻤다. 사실적이고 냉소적인 표현, 환경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태도가 글 밑에 적혀있는 연도로 자꾸 눈이 가게 했다. 1962년. 이 안에서만큼은 그의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고, 난 그의 글을 계속 읽고 있다. 이렇게라도 파고 들면 그간 엉켜있던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계절이 보일 때마다 들고 다닌다. 타인에게 꺼내지 못해 중얼거렸던 혼잣말이 떠오른다. ‘충동적 감성'에 대해 개성이라는 이해를 덧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 몇 번의 표지를 넘겼나. 해는 변하고 읽는 장소도 변했다. 점점 전혜린과 나이가 비슷해지고 있다. 여전히 내 손엔 그의 책이 들려져 있다. 사실상, 밖으로만 돌아다녔던 방황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다. 확신했던 감정은 허상의 결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간다는 자체가 방황기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며 태어남음 강요당했음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한 의혹 속에 불어오는 파란 바람에서 갈증보다는 시원함을 느낀다. 아무도 메꿔주지 못한 풍족함을 느낀다.
.... 그의 문장 속 구성 속에 매혹당해 현실 속, 과거에서 방황 중일까.
이런 나에게도,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한 그.
속에서 맴도는 말이 아닌, 겉으로만 표출할 게 아닌, 때때로는 아낌없이 표출할 줄 알아야 하는 문학인으로서의 글.
그렇다면 글쎄...
... 만약 내가 중고서점에서 만났더라면 과연 이 파란 바람한테 손을 뻗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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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제주도에서 태어나 육지를 바라면서 살다가도 결국 섬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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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s From Tu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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